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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눈이 온다.
얼마 전 천안의 첫 눈이 올 땐, 어린애마냥 와- 눈이다, 겨울 시작이다! 하며 나름 설레고 들떴는데
어제 새벽에 내린 눈 때문에 출근길에 SJ가 접촉사고를 내고, 온도계는 영하 10도 안팏을 찍고서
바로 다음날 오후 내내 쏟아붓는 눈줄기를 보니 이젠 눈에 보이는 것은 예쁜 눈이 아니라 걱정 덩어리다.
눈 앞에는 밖에서 일하고 있는 엄마, 아빠, RD, 오빠, 대전 부모님에 타향, 수원 친구들까지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라디오에서는 낭만과 현실을 섞어가며 눈에 대해 각자의 감상을 늘어놓고 있다.
동시에 '걱정도 일 끝내고 차 한잔 마시며, 창 보고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다 혼자 웃었다. 뭐 하자는 건지.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주변 제설작업은 잘 안되는 것 같다.
이놈의 동네, 이럴 때 '시골이구나' 절실하게 체감한다.
내가 출근까지 했었다면 SJ는 본인 퇴근에 내 퇴근까지 걱정을 곱으로 했겠지, 그런 면에선 차라리 다행이다 싶다.
바깥에는 어린 강아지들이 와글와글 모여 설아일체가 되고 있다.
저 아이들의 엄마는 단단히 입혀 내보냄과 동시에 빨래와 감기 걱정을 뒷통수에 달아두겠지 하다
매년 추억하는 어린 날에는 눈만 왔다, 하면 강아지 꼬리 흔들듯 나가서 옷이며 몸이며 엉망으로 만들고 돌아왔는데
그 꼴을 매년 반복해서 보고, 또 반복해서 치우던 엄마는 날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싶다.
어리지도,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난
밖에 무식하게 쌓여대는 저 겨울의 시작을 꽤나 복잡하게 맞이하는 중이다.
매년 정리한다며 여행이던 뭐던 갔는데, 시간이 남아도는 올해는 막상 예년의 반만큼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대로 보내도 괜챦은가, 2011-이라고 말한지 꼭 1년, 그 말을 다시 한 번 중얼거린다.
이대로 보내도 괜챦은가, 2012?
적당히 타협해서- 주책맞게 보일지 모르니, SJ가 무사히 퇴근하면 조용히 나가서 눈사람이나 하나 만들까 싶다.
내일이면 녹던지 깨지던지 하겠지만.
반성보단 희망으로, 후회보단 만족으로, 미움보단 감사함으로 정리하자.
올해는 그런 해, 너무 많이 받은 해다.
무식하게 쌓여가는 눈처럼.
2.
예전부터 아빠의 겨울점퍼를 볼 때마다 은근히 거슬리던 참이었다.
딱 봐도 좀 싸보이는데, 저것 가지고 한 겨울을 날 수나 있는건지.. 괜챦다고 하는데.
엄마의 이른 생일선물을 같이 보는데, 무심결에 한 아빠의 '내 파카도 많이 헤졌는데..' 라는 혼잣말이
귀에 너무나도 크게 들렸다. 그렇게 했는데 또 해야 하나
수원이며 내 개인적인 일까지, 이런저런 일들이 완전히 끝나서 이제 겨우 내 사치를 부려볼까 하다
생활비 펑크로 용돈을 만져보지도 못하고 오롯이 생활비 통장에 꽂은 날
헛헛한 마음과 내가 같이 동동거리다 결국 술로 함께 위로하고 지나갔는데
이번달에 또 그래야 하나 싶은 마음이 서운한 말 한마디를 울컥 뱉게 만들었다.
집에 돌아와 이런저런 정리 중에, 자꾸 그 오래된 파카를 입고 집에 들어오던 아빠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이건 거의 습관적인데, 이러면 안되는데. 돈 차압도 아니고 대체 뭐야! 하며 치우려는데
그 돈 내가 사치 부려 뭐할거냐는 해묵은, 그리고 반복되는 컴플렉스가 발동했다. 그놈의 착한아이 컴플렉스!
결국 며칠 뒤 백화점에 가서 신사에게 어울리는 가격대와 색을 돌아보곤
엄마에게 전화해서 보태주겠다, 하고 엄마는 꽤나 반갑게 받았던 것 같다.
정말 필요했었는지, 미안해질 정도로 당일 저녁 바로 아빠를 데리고 가서 꽤나 괜챦은 외투를 샀다.
아빠는 아주 좋아하며 동생을 시켜 사진을 보내고, 다음날 또 전화해서 거듭 고맙다며 껄껄 웃었다.
통화하는 내내
혼자서 착한아이 컴플렉스다 뭐다 했던
굳이 그걸 티를 내겠다고, 전화 말미에 '이걸 하고 난 또 나를 위해서 하고 싶었던 하나를 포기해야겠지-' 지껄였던
그리고 퇴근한 SJ를 (궁금하지도 않을텐데) 붙잡고 있는 소리 없는 소리 제 생각까지 보태가며 지껄여 댔던
싸고 빠른 내 입이 낯보다 더 뜨거웠다.
항상 네 성격은 네 돈값을 못 하는구나 라며 한껏 주눅이 들었다. 아직도 한참 덜 컸다.
3.
'올해는 다시 작은 후원을 해야겠다', '단 돈 5천원-만원이라도 누군가를 위해 써 보자' 했던가
아직 난 내 품 안에 있는 사람들 추스리는 것 만으로 바쁜가 보다.
나와 내 가족에겐 이제 일이만원의 가치는 적쟎은 차이가 나고 있다.
장난식으로 말하는 '내가 불우이웃이다'가 꼭 장난만은 아니다, 누구든지 그렇겠지만.
내가 누리지 못하는 대신, 가족에게 퍼붓듯이 보낸 몇십만원이 아까우면서도 또 아깝지 않다.
입맛은 조금 쓰지만 마음은 따뜻한 것이, 올해 마무리는 잘 했다 싶다.
아마 난 평생 이렇게 살겠지
스물아홉을 보내면서-20대 내내 중얼거렸던 그 말은 현실이 되는구나-
마지막 결론은 그렇게 났다.
내 20대는 해피엔딩, 새드엔딩, 열린결말?